*흑츠시 (뇌피셸=캐붕요소 다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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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

 

 넉살도 좋았다. 몇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걸 보니 천성인게 틀림없었다. 아쿠타가와는 지금 자신이 무슨 얼굴을 하고 있는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도 몰랐다. 복잡한 심경이였다. 그저 그 뿐이였다. 못본 사이 살은 더 빠진 모양이였다. 육안으로 보일 정도니 꽤나 고생한 듯 했다. 그렇다고 괴롭게 지냈을 녀석이 아니라는 사실에 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이젠 다 지난 얘기라며, 추억이라며 중얼거리지도 못할 기억에 절로 뒷걸음질 치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이럴 때만 제 말을 듣지 않는 몸은 원망스러웠다. 그러는 도중에 여전히 웃는 얼굴은 미완성된 단아함이였다.

 

 "어디가. 나 여깄어."

 

 아츠시는 두 손을 항복하는 양 들어보이며 고개를 살짝 옆으로 꺾더니 지긋이 바라보았다. 눈가 위를 가리는 검은 머리칼에 저도 모르게 제법 좋지않은 느낌을 받은 아쿠타가와는 마른침을 삼켰다. 악연이란건 만들지 말았어야했지만 마무리를 제대로 짓지못했다는 일말의 죄책감은 어쩔 수 없이 어딘가 안 쪽에 자리잡고 번져나갈 수 밖에. 제 감정 다루기엔 미숙하단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골 아픈 일까지 되리라는 감히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던 아쿠타가와였다. 늦겨울의 밤바람은 여전했다.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해 정류장에서 내릴 때까지만 하더라도 신통찮은 집의 온기가 그리도 그리웠건만 어째서인지 들여보내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였다. 목까지 코트를 여민 저도 저였지만 눈 앞의 아츠시라면 겨우 셔츠 한 장에 얇은 가디건 차림이였다. 초겨울 나기에도 무리일 것만 같은 차림에 언제 올지도 모르는 자신을 겨울바람을 온전히 맞아가며 기다렸다는 사실이 분명 어딘가 신경 쓰이는 구석이였다. 다만 아직은 눈 앞에서 얼굴을 마주할만큼 가라앉은 것도 아니였다. 미동도 없는 탓에 복도의 전등이 잠시 꺼졌다. 아쿠타가와는 이유모를 마른침을 삼키며 코트 안주머니에서 열쇠를 찾아 익숙하게 열쇠구멍 안으로 밀어넣어 돌렸다. 달칵. 말끔하게 열리는 문을 반 쯤 잡고 뒤를 돌아보았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는 아츠시의 목에 머리카락이 감겼다. 애써 고개를 저어가며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폐부까지 스며드는 밤공기는 찼다.

 

 "안들어올거냐."

 

 머뭇거리는 발걸음에 문을 완전히 열자 조심스레 안에 발을 디뎠다. 현관의 끝자락에 걸쳐진 발에 살며시 문을 닫아 잠궜다. 그제야 보이는 녀석의 얼굴은 복도에서 마주한 것보다 허옇게 달아있었다. 핏기가신건 예전만 했고 눈 아래에 끌리는 앞머리가 그늘져 눈 밑에 자리한 다크서클과 같이 한껏 음산해보였다. 자그맣게 피어있던 홍조는 숨을 거둔 모양이였다. 기껏해야 귀와 코 끝이 빨갰다. 추위의 탓이 분명했다. 현관에서 이도저도 못하고 건너편에 시선을 던지고 있던 아츠시가 제게 닿는 눈초리에 고개를 돌리자 자연스레 눈이 마주했다. 고개를 조금 위로 올려보았다. 힘겹게 웃어보였다. 키, 컸네. 까만 정수리가 보이는게 그 시절보다 작았다. 아쿠타가와는 구두를 벗어 제자리에 두곤 거실로 들어섰다. 소파 한 켠에 습관같이 서류가방을 내려놓았다. 그제 바꿔 눈 부신 형광등도 켰다. 느릿하게, 분주하게 움직여도 제게 붙은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탐탁찮은 기분이였다. 보일러를 틀고 외투도 벗어 던졌다. 도로 거실로 돌아오자 현관과 그 너머에 벽이라도 있는 양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불편해하는게 눈에 훤했다. 그게 싫었다. 뭐래도 다 싫을 것같은 예감이 들었지만 쩔쩔매고 있는 저 모습이 보기 흉했다. 절로 인상이 구겨지는건 어쩔 수 없었고 머리 위 전등이 다시 한 번 꺼졌다. 센서니 움직이면 켜질텐데 역시 불은 도로 켜지지 않았다. 손바닥을 몇 번이고 문지르다 결심한 듯 다가서자 야트막하게 켜지는 소리에 움츠러든 아츠시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들어와. 겨우 현관의 끝에서 한 걸음 나왔을 뿐인데 눈동자가 이리저리 구르고 아랫입술을 물었다 놓길 반복하며 마른침을 삼키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고작 한 걸음에 불과했다.

 

 "있기 싫다면 호텔 잡아주겠다."

 

 "아니-. 있고 싶어."

 

 소리도 없이 조심스레 갈라진 가죽구두를 벗어 내려놓은 아츠시는 몇 번이고 망설이다 거실을 밟았다. 그와 동시에 아쿠타가와는 한숨을 놓았다. 겨우 이게 뭐라고 이러고 있는가 싶다가도 어쩔 수 없다는 사실에 금방 도로 수긍해버리며 마는 것이였다. 도무지 더는 기다릴 수 없을 감정에 이런저런 생각에 겹쳐 제자리서 무엇도 못하는 아이를 잡아 끌어다 거실 탁자 앞에 앉혔다. 급한대로 커피포트에 물을 올려 끓기 기다리는 동안 자리에 앉았다.

 

 "다자이 씨는 알고있는거냐."

 

 "-아직."

 

 "내일 말씀드려라."

 

 "............"

 

 "싫다면 내가 전해놓겠다."

 

 "싫은거지, 이젠."

 

 실증과 슬픔과 분노의 어딘가와 같은 감정이였다. 실은 종합적으로 짜증에 가까웠다. 아츠시도 알고 있었다. 뻔히 알고 있었다. 좋은 소리 늘어놓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 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였다. 싫은 소리 들을 각오로 왔지만 마주했을 때 미미하게 떨리던 눈이 무서웠다. 더 이상 자신을 애정하지 않는 감정이 두려웠다. 그 자체만으로 제 존재에 혐오감이 들고 헛구역질이 올라올 지경이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다정한 사람이니 아니라고 말해줄 사람이였지만 진심은 무엇보다 잔혹한 법이였다. 입 밖으로 내지 않는 그 말이 어째서 그리도 원망하면서 갈구하는지 저도 모를 노릇이였다. 뒤늦게 소름이 돋았다. 추웠다. 벌어진 가디건 사이를 좁히며 남는 팔 부근의 옷감을 쥐어짰다. 물이라도 떨어지길 바랬다. 분명 파랗게 질렸을 것이다. 입술은. 그러길 바랬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렇게 얄팍한 동정심이라도 원하는건지도 몰랐다.

 

 "아츠시-"

 

 그 잠시를 참지 못하고 끓어오른 것은 감정만이 아니였다. 허연 김을 뿜어내며 한계노라 말하는게 아쿠타가와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이 덜 끝났다하더라도 물을 뒤엎고픈 맘은 없었다. 좋은 핑곗거리였다. 무어라 답해야할지도 몰랐다. 처음부터 모른척하고 지나쳤다면 조금은 덜 아팠을게 분명해 묘하게 분했다. 그래도 결국 이리될 줄 알았기에 후회는 적었다. 그 편이 맘 놓이는건 어쩔 수 없는 천성이였다. 전원 OFF로 돌려놓고 코드까지 빼자 얄쌍한 손이 겹쳐졌다. 셔츠 너머로 닿아오는 울음기에 얼어붙었다.

 

 "말, 잘 들을게."

 

 잔뜩 물기가 섞여났다.

 

 "나, 나..이제 괜찮아. 병원에서도 괜찮다고 했어..진짠데."

 

 느릿하게 다급했다.

 

 "이젠 아무도 안, 죽여.."

 

 허리께에 위태롭게 걸쳐진 두 손은 앙상했다. 넌 언제부터 이렇게 나약했었던가.

 

 "-선배."

 

 나 좋아하잖아.

 몇 번이고 인정해버리는 나약함은 견딜 수가 없었다. 분명 그 웃음에 거절하지 못하는거라 믿었건만 이젠 눈물이라니.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했던 사실이 다가오며 목을 옥죄여갔다. 간단했다. 한 마디만 뱉으면 됐다. 아니라고. 그걸로 끝나는 이야기였다. 역시 악연은 만들지 말아야 했다. 마음따위 주는게 아니였다. 흐느낌이 들렸다. 한없이 위를 바라보던 고개가 마침내 떨구어졌다. 손등을 걸쳐 손을 잡아주었다. 차가웠다. 병원 생활에도 손만은 매끄러웠다. 매끄럽게 끼워맞춰들어가는게 유감스럽게도 살인자의 손이였다.

 

 "선배."

 

 아아. 역시 두 말 할것도 없는 악연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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