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이 (님) 리퀘스트 가 아닌 생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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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키타 소고, 열 아홉. 화풍이 독특하기로 소문났다. 그러니 호불호가 격하게 벌어지는 그런 류에 속하기도 했다. 당연한 일이였다. 사람은 누구든지 새로운 것을 추구하거나 옛 것을 간직하려드는 법이니 말이다. 그의 그림에서는 형체를 찾아볼 수 없었다. 매번 형형색색만이 흩뿌려진 것이 전부였다. 무엇 하나를 표현해내는 것은 오로지 색 뿐이였다. 곧잘 위험한 발언도 해대는 녀석이였지만 단 한 가지만은 굳게 입을 닫아버렸다.

 

 "색으로 표현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글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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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이, 콘도씨가 부른다고."

 

 작업실의 구석에 웅크리고는 두 손을 빤히 내려다 보던 소고에게는 들은 척 조차 용납되지 않는 듯 보였다. 어이-, 사람이 부르면 반응을 해야할거 아니야. 거참. 히지카타의 중얼거림과 함께 소고는 두 손을 털고 일어났다. 몇 날이고 밤을 샌 탓이겠지만 그렇다고 하여 평소 그리 살가운 인상의 소유자가 아니였음에 히지카타는 괜시리 흠칫하고 눈가의 주름이 잡혔다 사라졌다. 급하게 작업실을 나서는 바쁜 그를 붙잡았다.

 

 "야."

 

 "..뭔데요."

 

 "택배왔더라. 가져가라."

 

 역겹다는 듯 인상을 구기며 잡힌 손목을 세게 빼내어 메만지며 걸음을 재촉하는 그였다. 마른 입술을 축였다. 마침 색이 떨어져버린 탓에 작업의 한창에 멈춰야만 했었다. 그 부분이 영 석연찮았기 때문에 제때 도착한 제 물건에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시간에 쫓기고 있을 따름이였다. 바빠 죽겠다고, 이쪽은. 이를 갈며 미닫이 문을 세차게 열자 익숙하다는 듯 웃으며 반기는 콘도가 있었다. 오, 소고. 얼른 여기 와, 앉아 봐. 앉아. 무슨 일인데요. 별 건 아니고- 그럼 갈게요. 중요하다고! 그리고 이어지는 한참의 눈싸움. 항상 져주는건 콘도였다. 애초부터 그런 사람이였다. 욕심내서 그러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음에도 가만히 기다려주는 사람. 작업 바쁠텐데 불러서 미안하다. 소고는 긴 소매를 휘적이며 소파 등에 몸을 묻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굳이 보지 않아도 뻔히 보일 저 사람의 얼굴에 피식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나이 어린 애송이 상대로 뭘 그렇게 매사에 진지한건지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기꺼이 저를 받아준 것이라고. 소고는 자기 입으로 말하기도 무르지 않다. 그런 상대가 있다면 일순위는 혈족되시는 누나. 그 다음을 장식하는 분이 콘도 되시겠다. 정정하자면 일순위란건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정도. 몇 해 전 지병이 돋으면서 이래저래 합병이 겹쳐져 그 작은 몸뚱아리에 다 담지 못한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 공백기의 삶을 이어가게 도와준 장본인이니 무를 수 밖에 없는 노릇이였다.

 

 "이번 전시회 말인데, 토시로 파트까지 해도 될거 같아서 더 그리던가 아니면 2차로 미뤄뒀던 것들 까지 같이 전시해도 될거같아."

 

 "그 자식은 뭘 한다고 자식 파트를 빼요."

 

 "얼마 전에 개인 전시회 했잖아. 일부러 그 때부터 이번은 빠지기로 했었고 나한테 미리 얘기했어. 물론 너하고는 얘기가 안되있을 줄은 알았지만- 화 내지마!"

 

 "화 안났어요."

 

 "아..그래."

 

 "몇 장 더 필요해요."

 

 "열- 두어 점 정도."

 

 "전부 새로 안그려도 되죠."  

 

 "당연하지. 니 실력이 어디간다고."

 

 손도 대지 않은 차는 식어버렸다. 무심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고에게 콘도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미처 한 걸음도 떼지 못하고 소매를 거둬 주인을 기다린 잔을 들어 단숨에 비워냈다. 됐죠. 짧은 한 마디를 마무리로 소고를 작업실로 향했다. 그 잘난 '열 두어 점' 때문에 골 썩게 생겼으니 그 정도면 잘 참았노라 생각했다. 망할 자식. 중얼거리며 볼품없는 얇은 종이에 싸매여진 캔버스 여럿을 꺼냈다. 일거리가 늘었다는 생각보다 늦을지도 모른다는 초조함이 강했다. 바닥부터 벽까지 빼곡히 쌓은 최근 작업물에 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꼬박 두달하고 조금 더 남은 전시회 임에도 열 점 이상씩 그려내기엔 턱없이 부족할 뿐이였다. 

 유난히 소고의 전시회는 작게만 열었다. 크고 떠들썩하게 하는 갤러리가 아니였을 뿐 아니라 작가의 개인 의사가 반영된 것이였다. 조금 더 보고 싶다는 아쉬움이란 묘미를 남긴다 라고 평론가들은 잘들 떠들어대지만 혼자서들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해먹으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마쳤다고 전시회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내지르며 뛰어다닐 상식에서 벗어난 사람은 없었지만 조용히 열고 싶다는 희망사항이였다. 그래서 대형 기획전 참여를 모두 거부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물론 덧붙이자면 거들먹거리는 자식들 그림 옆에 제 작품이 걸려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한 모욕과 수치라는 것이였다. 이 말은 그대로 출판될 예정이였으나 다음 인터뷰 타자였던 히지카타의 1차 검열에 걸려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다. 더불어 콘도의 2차 검열로 그런 류의 발언들은 막혀버렸다.

 

 "야 내가 가져가랬지."

 

 "두고가지 그래요."

 

 "너 평소에 하던거 있으니까 그걸로 하면 될 줄 알았지."

 

 "전시회마다 컨셉 잡는건 왜 모르실까, 헛똑똑아."

 

 "열 두점 니가 다 안맡아도 되잖아."

 

 "뭐 그럼 잘나신 그 쪽께서 도로 회수해주시게."

 

 "쉰다고 했잖아. 할거 였으면 지금 노닥거리고 있겠냐."

 

 "네네. 잘났네요. 꺼져."

 

 "이것도 같이 왔더라."

 

 미닫이 문이 닫히고 그제서야 소고는 힘 준 어깨를 떨궜다. 이제껏 준비해온 컨셉과 상반된 컨셉으로 내어도 충분했지만 찝찝했기 때문이였다. 개인 소장인 갤러리인 만큼 전시회도 꾸준히 열고 있지만 냈던 그림을 또 낸다는 사실 자체가 스스로에게 용납되지 않는 부분이였다. 설사 그게 본래 제 파트가 아니였다는 사실에도 생각을 바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프라이드 였고 철칙이였다.

 

 첫사랑.

 

 이번 전시회의 컨셉이였다. 단언컨데 이제껏 제 그림에 그런 감정을 담은 적은 없었다. 낯간지럽기도 했고 그다지 저와는 상관없기도 했다. 어쨋거나 그 이유가 어찌되었든 제 관심분야가 아니라는 점은 확실했다. 흔해빠진 여자 하나 덩렁 그려놓고 끝이다 하고 손을 놓고 싶지도 않았고 더군다나 그는 형체를 그리지 않았다. 그런 미묘함을 색으로 표현해내는게 오키타 소고 였지만 이러거나 저러거나 귀찮기 짝이 없는 얘기였다. 적당히 빨간색이나 캔버스에 뒤엎고 심장이니 뭐니 알아서들 떠들어대게 내버려두고 싶은 심정이였다. 평론가들이 제일 잘 하는 짓이잖아.

 머리를 헤집던 소고는 히지카타가 가져다준 소포로 몸을 돌렸다. 알게뭐야. 두 달이나 남았잖아. 두꺼운 소설책만한 크기의 상자를 갈라내자 보란듯이 자리한 것은 주황색 물감들이였다. 빼곡히 쌓인 물감들을 한참 바라보다 아직 제 손 끝에 남은 주황빛에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마저 작업할 수 있겠다. 복잡한 얘긴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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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황색으로 벌인 광란의 작업이 끝나자 그는 붓을 떨구었다. 사방에 색색이 튀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 편이 좋았다. 손등으로 턱선을 쓸어내렸다. 뜨거운 체온 사이로 식은 주황빛이 번지는 소리가 들렸다. 좋았다. 구석에 자리한 수도꼭지를 틀어 배수구 아래까지 색을 흘려보내었다. 그림에 해가 될까 작업실엔 보일러를 틀지 않기 때문에 덩달아 물까지 온수불능의 상태였다. 덕분에 사라진 색위에 시린 물방울이 맺혔다. 이걸로 끝났다. 제 파트의 메인은 끝을 매었지만 늘어난 파트 덕분에 욕짓거리를 올라왔지만 어둑한 방에 신경질적으로 슬리퍼를 끌며 스위치를 키자 두어번 깜빡이더니 환하게 밝히며 늦은 오후 내내 제가 저지른 현장을 적나라게 드러내주었다. 기꺼이 받아들이는 모습이였지만 담담했다. 기꺼이 라기보단 그저 일상에 불과했다. 6시를 조금 넘긴 시계를 한참바라보았다. 몇 시 였더라. 혼자 되내여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씁쓸해진 소고는 짧게 기지개를 펴고는 물감들을 벽쪽에 밀어둔 사물함에 넣었다. 그 안은 온통 물감들이였다. 주황색. 조심스레 두손으로 닫고 이마를 박았다. 이마께가 시렸다. 저녁을 위해 발걸음을 돌리다 발치에 체이는 종이를 사그락하고 주워들었다. 수신인 뿐인 악질적인 편지라면 곤욕스럽긴 하지만 마지막 한 마디까지 지옥이나 가라고 열심히 써주시는 어디 사는 열혈팬들을 생각하며 작은 조소를 흘렸다. 그리고 그의 예상과 다르게 하얀 봉투에서 떨어진 것은 티켓 뿐이였다. 이 기지배가. 보란듯이 미간이 구겨지더니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다. 익숙한 번호를 누르기 시작할 즈음 화면을 잠궈버렸다. 나름대로 생각따위 있을리가 없으니 넘어가자는 행위에 가까웠다.

 

 8시 40분 시작. 넉넉한 시간과 졸지에 두 자리나 차지할 수 있게된 좌석부자가 되어버렸다. 쓸모없는 짓만 골라서 하지, 이 기집애는. 모처럼의 VIP 석인 모양이였다. 제 예매는 3층이니 엄지 손톱만하게 보일게 뻔했다. 공짜로 좋은 자리라니 사양할 필요는 없었지만 모처럼 3층의 A열의 중간석을 사수했던 수고가 사라지는 것은 거부할 것이였다. 찬찬히 티켓을 다시 살피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아, 오늘 작업 다 하셨어요?"

 

 "어."

 

 "전 남았는데 말이죠."

 

 "힘내라."

 

 "그러고보니 히지카타 씨 파트까지 하신다면서요."

 

 "니가 할래, 야마자키. 귀찮은데."

 

 "무슨 말씀이세요. 제 실력으로 무리에요. 제 파트도 벅찬데- 그건 뭐에요?"

 

 "아- 공연 티- 너 시간있냐."

 

 "오늘 작업분은 조금 남았는데..말이죠."

 

 "너 보러가라."

 

 팔랑이며 티켓이 야마자키의 눈가를 스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계단에 기대 희미하게 웃었다. 너 보러가.

 

 "오키타 씨, 이거..표 어떻게 구하셨어요?!"

 

 "그냥-"

 

 "이거 요즘 구하기 힘들텐데, 게다가 VIP 석!!..같은걸 저한테 주시면,"

 

 "난 피곤해서."

 

 "이거 표값만 15만...원! 이라는데.."

 

 손을 훠이 저어 보이며 소고는 층계를 올랐다. 나 바쁘다고 전해줘라. 야마자키는 멀뚱히 그런 소고의 뒷모습만을 올려다보았다. 이내 모습이 사라지자 다시 티켓으로 시선을 내리박았다. 전해달라고? 갸우뚱하다 뭔가 깨달았다는 듯이 소고가 사라진 위를 가벼운 충격에 싸인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오키타 씨, 이거. 덧붙여 한 마디가 들려왔다. 사거리 쪽 꽃집에서 내 이름 말해라. 야마자키는 급하게 계단을 올랐다.

 

 "오키타 씨, 이거!"

 

 "얼른 준비해서 가."

 

 "어떻게 제가 가요!"

 

 "못갈게 어딨어. 여자애한테 고백받아도 그럴거냐, 나 피곤해."

 

 "그런게 아니잖아요!"

 

 "작업도 있고 히지카타 자식 파트 매우려면 시간이 어딨냐. 잠깐 눈 붙이고 말거니까 꽃 찾아가라. 그거 계집애 알레르기 있거든."

 

 픽하고 바람 빠지듯 웃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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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엇나가는 행위를 나름 즐겼기에 따로 오페라 글라스 마저 소지한 상태였다. 조금 지연되고 있는 꼴을 보아하니 얼굴이 굳어 풀기 위할 따름일 것이였다. 이러나 저러나 여전히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앉아서는 1층이 보이지 않았기에 야마자키가 어떤 잡스런 자세를 취하고 있을지는 안타깝게도 볼 수 없었지만 대충 상상할 수는 있었다. 보나마나 우스운 꼴이겠지. 이내 지체에 대한 사과와 공연 시작을 알리는 벨소리가 극장 안에 울렸다. 서서히 불이 가라앉고 무대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소고는 여유롭게 초점을 맞춰둔 글라스를 들어 한 걸음 나가오는 무용수를 보았다. 프로는 프로라고 생각하며 아직 옅게 굳은 얼굴에 슬그머니 미소를 띄웠다. 묶지않은 머리카락이 길게 허리께 까지 내려와 아직 가벼운 동작에 제 자리에서 머물고 있었다. 본래 핏기 가신 살갗이였으나 온몸으로 분노를 표출해낸 것인지, 전신화장이라도 한 것인지 불그스름한 손 끝이 파도 처럼 넘실거렸다. 왼 손을 힘 없이 들어올려 등 뒤로 떨구더니 바닥을 짚고 제자리를 위 아래로 배회하곤 그 자리에 자리 잡고 앉았다. 위로 목을 쭉 빼고 눈을 내리감은게 어깨 아래서부터 공연장 바닥까지 늘어진 머리칼에, 숨을 들이마시며 뒤로 턱을 빼내어 두 팔이 허공에서 유영하며 의심없이 내딛는 한 걸음에, 무던히도 내짓는 표정에 차마 말로 이루못할 손 끝에, 소고는 결국 어깨를 툭 떨구며 그 눈을 곱게 접으며 흩날리는 감정을 내버렸다. 누가 말했던가 당장의 눈 앞의 적보단 유종의 미라고. 그게 누가 되었든 한 마디 쏘아주고 싶은 마음이 한 가득 넘쳐 끝내 입가를 가리고 터져나오는 뜨거움에 아랫 입술을 베어물어야만 했다. 눈 앞의 하나 조차 집중치 못하는데 어찌 유종의 미를 거두겠느냐고. 도약하는 한 걸음에 허리께에서 펄럭이던 하얀 레이스가 면사포 마냥 날리고 하얀 두 다리를 감싸안았다. 아랫 입술을 잘근거리며 소리없이 터져나오는 박동에 아플 새도 없이 바쁘게 하얗게 바랜 동작을 쫓았다, 그 쌍안경의 두꺼운 유리알  너머로. 더할 나위 없이, 의심할 한 치의 여지조차 없이 그 뜨거운 손 끝에서 이뤄내는 선은 그의 뮤즈 였다.

 

 그가 막 갤러리에서 활동하기 시작할 무렵이였다. 고작 열 여섯의 제 감정 하나 토로할 줄 모르던 그 때였다. 학교는 마치기 바랬던 콘도의 손에 이끌려 원치도 않는 사회에 도로 던져지던 당시의 좌절감과 환멸감이란 쉬이 잊혀지지 않았다. 입학 시험조차 치루기 어렵다는 그런 곳에 어린 그의 밀어넣으며 네가 하고 싶은대로 해봐 라는게 단순한 헛소리에 그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모멸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누이와 이별한 이후로 그의 살갗에서 유화 향이 사그라들었다. 제게 붓을 쥐어준 것도 누이였고 결국 놓게 된 것 역시 누이에 그치고 말았다. 평생 가까이 할 일따위 없으리라 죽는 날까지 믿었다. 꼴보기 싫다며 자해를 떠올릴만한 행위를 반복했고 수업은 커녕 출석일수가 얼마나 비었는지보다 채워져있는지를 확인하는게 빠를 지경이였다. 타이르고 달래고 큰 소리를 내어보아도 캔버스 앞에 서려하지 않았다. 그 앞에서 자신은 죄인에 불과하다는 의미심장한 말만을 늘어놓았다. 지속되는 수전증과 불면증에 온전한 하루를 시달려야 했다.

 

 "매일 같이 여기서 뭐하는거야."

 

 "..신경 꺼."

 

 "니가 내 연습하는걸 방해하니까 그런거지."

 

 "그래."

 

 미술실 따위는 근처도 가고 싶지 않았고 저를 찾는답시고 활기치고 다니는 꼴도 보고 싶은 추호도 없었다. 좋은 말로하면 자기가 하는 일을 사랑하고 자신감을 가지는 것이지만 그의 눈으로 비춰진 것은 그저 꼴사나운 짓거리에나 뒤지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음악과나 미술과나 무용과나 사이좋지 않은 관계를 잘도 유지해가고 있었기 때문에 존재감도 적으니 그런 소고에게 있어 빈 체육관이란 장소는 몸을 숨기기에 적합하다 못해 제 집과 같았다. 체육관은 무용과가 점령했기 때문에 정규 수업으로 체육이나 전시를 위해 빌리지 않고서야 발걸음할 이들도 없었다. 그래봐야 겨우 쪽잠이나 청할 뿐이였다. 그 늦은 시간에 누가 남아있을 줄이야 생각조차 해 본 적도 없었고 이어폰이 거친 발소리를 죽여주었기에 눈치 챌 기회도 없었다. 그리고 그런 장소를 침범당해버렸다.

 

 "넌 여기서 뭐해. 무용과 아니잖아."

 

 "피난처."

 

 "음악과야?"

 

 "미술."

 

 "아, 안그려?"

 

 "안그려."

 

 "왜 여기 입학한거야?"

 

 "내가 어떻게 알아."

 

 "넌 아는게 뭐냐."

 

 "없어."

 

 "진짜 깨끗한 뇌구나."

 

 "신경 꺼라." 

 

 "할 일 없으면 나 턴 봐줘."

 

 "싫어."

 

 "너 여기 있는거 미술과 쌤한테 말하면 되는거지?"

 

 "....어쩌라고."

 

 "봐달라고."

 

 "본다고 내가 아냐."

 

 "그러니까 봐달라는거잖아, 멍청아.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때 어색하면 그게 진짜 끝장나는거지. 같은 무용과 애들이 보는거랑 다르다고, 알겠냐."

 

 긴 머리를 한 갈래로 높게 질끈 묶고 큰 반팔 셔츠가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가볍게 한 발을 찍고 돌았다. 말 그대로 제자리에서 돌았다.

 

 "이상하냐."

 

 "아니."

 

 "그럼 어떤데."

 

 "괜찮아. 됐지, 이제 귀찮게 굴지마."

 

 그저 유별난 애 정도로 밖에 비치지 않았다. 미치지도 못할 헛소리 사이에 끼여 있는 것보단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까, 일수는 점점 채워져갔다.

 

 "제대로 수업 안들으면 유급할지도 몰라, 너."

 

 "상관없어."

 

 "상관있어."

 

 결코 귀찮은건 하루이틀이 아니였다.

 

 "귀찮게 굴지마."

 

 "그럼 내 부탁 하나만 들어라. 그러면 그만두지 뭐."

 

 "내가 뭐하러 그런 짓을 해."

 

 "그럼 알아서 하던가."

 

 새침하게 묶어올린 머리칼이 휘청거렸다. 허리께에 조금 닿지 못하고 등허리를 치대는 색에 소고는 미간을 구겼다. 거슬려.

 

 "뭔데."

 

 "나 그려줘."

 

 "그림 같은거 안그려"

 

 "미술과 입에서 저런 말을 들을 줄이야." 

 

 그럴 줄 알았다는 과장된 팔동작과 비웃음에 가까운 표정에 일부러 높이는 소리.

 

 "그릴 수 있잖아, 그러니까 따지자면- 재능낭비."

 

 "....이제 생각이 안난다고."

 

 "무슨 소리야."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고, 하고 싶어도 못해. 형체같은거 다 사라져버리는데."

 

 "색."

 

-

 

 [잘도 안왔다- 이거지.]

 

 "분명 바쁘다고 야마자키 자식한테 전하랬다."

 

 [니가 봐야 의미가 있다니까!]

 

 "제대로 꽃도 보냈다."

 

 [그거야 당연한 도리 아니야? 여전히 깨끗한 뇌인거야, 넌?]

 

 "그 도리는 다 했으니까 그만하라는 소리지."

 

 [진짜- 얼마나 당황했는지 알아! 당연히 센터에 너 있을 줄 알았는데 멍-한 얼굴이 하나..!]

 

 "멍하다니 들으면 섭섭해하겠네."

 

 [니가 섭섭해하라고!!]

 

 "뭐- 별로."

 

 [이번에 평론가 자식들 평도 좋단 말이야!! 내가, 진짜 어! 얼마나! 망할 놈아!!]

 

 "네네."

 

 [너무하네.]

 

 "이제 알았냐."

 

 [아니. 익숙해.]

 

 "그럼 다행이고. 그런 김에 마지막 턴 때 크로스 하지 말지. 크로스는 그닥 취향이 아니라서 말이야."

 

 [어- 잠깐만 뭐라고?]

 

 "끊는다-"

 

 [야! 야! 야 이 도S 자식아!!]

 

 새삼 한결 편해진 얼굴을 하곤 아무렇지도 않게 종료버튼을 누른 소고는 다시 걸려올 전화에 화면조차 끄지 않고 끊어진 통화기록을 내려다 보았다. 물론 그럴 새도 없이 도로 걸려와버렸지만.

 

 "뭐."

 

 [야아아-!!]

 

 "야아아-!!"

 

 휴대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짧게 끊어지는 목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육성에 그의 시선은 당연스레 문가로 갔다. 세차게 미닫이 문이 열리고 조만간 새로 장만해야될지도 모를 휴대전화를 아스라질것 마냥 쥐고 흡사 제 머리색과 비스므리한 얼굴색을 한 여자를 태연스레 맞이했다. 아 왔어.

 

 "아 왔어? 왔어어? 왔냐고?! 왔다 이 자식아!"

 

 "소리 좀 그만 지르지."

 

 "안지르게 생겼냐!"

 

 "알아서해."

 

 당장이라도 한 대 쥐어팰 얼굴에 소고는 무죄를 주장하는 양 두 손을 들어보였다. 미리 고통에 대비해 어금니를 맞대어 물었다. 눈을 살포시 내리감으면서 그 찰나의 고통을 폐부로 느끼기도 전에 식은 손이 목덜미를 감쌌다. 품 안 가득 밝기만 했다.

 

 "뭐하냐."

 

 "..알아서 하라며."

 

 "안기는건 뭐 하자는 건데."

 

 "아 이럴땐 좀 가만히 모른척하라고! 이러니까 니가 연애도 못하고- 책으로 연애할 새끼지 아주.."

 

 "이럴 땐 책에서 밀어내래."

 

 "그딴 책 갖다버려!"

 

 소리로 터져나왔다. 환희를 참지 못해 기어코 터져버렸다. 

 

 "뭐, 뭐가 웃겨."

 

 "별로."

 

 "...보러 왔으면 왔다고 했으면 좋았잖아."

 

 "내 돈낸건 봐야지."

 

 "어디에 있었는데."

 

 "3층 A열 센터석."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올려다 보았다. 그에 진짜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졸업 전시회 출품은?"

 

 "다 끝났는데."

 

 "왠일이래."

 

 "졸업하고 싶어서."

 

 "아."

 

 빠른 수긍과 함께 도로 가슴팍에 얼굴을 묻자 허리께까지 떨어지는 머리카락 위에 손을 얹어 쓸어내렸다.

 

 "밥."

 

 "그게 어쨌다고."

 

 "먹자고. 다른게 있냐."

 

 "니가 사냐."

 

 "남자친구라는게, 지 애인 무대는 이상하게나 봐놓고는."

 

 "아, 그거 기억 왜곡."

 

 "니가 사!"

 

 겉옷을 집어들며 작업실 전등을 껐다. 잔뜩 열려버린 문과 문 사이 가득 빛으로 찼다. 먼저 앞서 기다리는 뒷모습에 그늘이 졌다.

 

 "야."

 

 대답은 없었다.

 

 "야."

 

 마찬가지 였다.

 

 "카구라."

 

 "응?"

 

 "..가자."

 

 그 자리는 온전히 온기였다.

 

-

 

 "무슨 색, 무슨 소리야."

 

 "색만 쓰라고. 미술과 친구랑 미술관 간 적 있는데 색만 쓰기도 하던데. 그거 너도 하면 되잖아."

 

 "넌-"

 

 고개를 갸우뚱 하며 비킨 자리로 체육관의 센 조명이 눈에 닿았다. 아 씨.. 연신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는 그의 눈가에 물기가 섞여들었다. 분명 깨끗하다 말 못할 바닥에 하얀 연습복을 입은 다리가 주저 앉았다.

 

 "눈 떠봐, 아픈거야?"

 

 떠지지도 않는 눈을 억지로 비집으며 물기가 섞여 위로 말려올라간 자리에 선명한 주황이 자리했다. 단지 그것 뿐이였다.

 

 "괜찮아?"

 

 "..야, 너."

 

 "내가 한거 아니거든."

 

 "이름 뭐냐."

 

 "나?"

 

 "그럼 누구."

 

 "카구라."

 

 빠르게 번져나갔다.

 눈을 감아도 짙게 퍼져나간 주황이 분명했다.

 

-

 

작년에 리퀘받고 올해 끝냈다(!)

미묘하게 게을러 보이지만 미묘한게 아니라 확정된 사실이다!!!

생일은 지난지 오래라고 하기엔 이제 의미 없지만 그냥 그렇다고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아 편의상을 위해 '~해' 는 생략해버렸습죠..

대충 2년이였나 2년! 뒤의 소고+5년 후의 카구라 모습으로 봐주셨으면 합

그게 이미지 상 맞아떨어지니까..어-

 

미안하고 사실 후반부 끝낼 수가 없어서 강제 종료 시켜......읍읍-!

 

미안하다아아아ㅏㅏ!!!!!!!!!!!!!!!!!!!!!!!!!!!!!!!!!!!!!!!!!!!!!!!!!!!!!!!!!!!1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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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 요소 있습니다)

 

-

 

 리히트 지킬란드 토도로키. 열 여덟. 세간을 떠들석하게 하는 천재 피아니스트, 하고 흥미롭다.

 딱 그 정도였다. 제 이브에 대해 아는 것을 떠올려 보아도 결코 여럿 떠오르는 법이 없었다. 이젠 제 피에 코를 박고 숨 죽인 사람의 형태만으로 남아 역한 기억이 되고 말았기에 솔직히 털어놓자면 얼굴은 고사하고 존재도 잊은지 까마득했다. 한 번 잃은 흥미가 죽음으로 다시일어날리가 없었다. 물을 끼얹은 화로에서 도로 불이 피어오르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어린아이 마냥 구는 부분이 남아있다. 이것은 탐욕의 신조인 본인조차 인정하곤 하는 부분이였다. 흥미로운 것이 좋다. 재미난 것이 좋다. 질리는 것이라면 사절이다. 그런 면이 탐욕스러웠고 그의 만들어진 정체성에 가까웠다.

 어디까지나 로우레스 에게 있어 이브는 흥미와 놀이의 대상에 불과했고 질리면 장난감 상자에 넣기는 커녕 떨구어 산산조각 나는 말로인 일시적인 것일 뿐이였다. 어차피 인간이란 죽기 마련이니 그 명 좀 줄였다고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발상보다는 눈 밖에 났으니까 에 가까웠다.

 

 

 "모처럼 휴일인데 말임다-."

 

 로우레스는 발치에 걸리적거리는 돌멩이를 걷어차며 불만을 토로했다. 길덴스턴은 초근접으로 인형탈인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암묵적인 협박이였다. 로우레스는 길게 눈을 죽- 찢더니 혀를 찼다. 알았슴다, 알았슴다.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이고 주머니에 손을 꽂아넣은게 나태와 닮아있었다. 저런 인형탈인 채 돌아다니면 눈에 띌게 뻔했다. 무슨 배짱인지도 알 길이 없었고 과보호 정도로 밖에 눈에 비치지 않았다.

 

 "리히땅은 댁들 처럼 멍청하진 않으니까 알아서 잘 놀다 올거 아님까."

 "사고라도 일어나면 큰일이란 사실을 왜 모르는거야."
 "리히땅이 사고라뇨. 그럴리가 없슴다."

 

 어리다 해도 사지분별은 확실할 나이였다. 미아 찾기도 아니고 우습기 짝이 없는 연출을 굳이 뛰어나가 해야할 이유도 없었고 리히트는 그렇게 손이 많이 가는 어리광쟁이나 사고뭉치도 아니였다.

 

 "간식시간 전 까지는 돌아온다 말하고 나갔어. 근데 지금은 3시잖아."

 "아아- 확실히. 리히땅이 간식을 거부할리가 없는데 말임다. 안온다면 제가 먹어치워버리면-"

 

 길덴스턴은 다시 한 번 푸른 고래와 어울리는 검은 동공을 들이밀었다. 장난임다! 쓸데없이 제 이브에 더 충실한 서브 클래스는 꽤나 속이 꼬이는 것이였다.

 

 애초부터 리히트가 사라지지만 않았어도, 제 시간에 간식을 먹기 위해 돌아오기만 했다면 이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였다. 연주회가 끝나고 호텔로 돌아온지 얼마 되지도 않아 잠시 나갔다 오겠다며 골아떨어진 로우레스 따위 내버려둔 채 그는 홀로 나섰다. 좋아하는 크림소다에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준비해두었다는 로젠의 말에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다는 리히트의 모습을 떠올리자면 무슨 일이 생긴게 분명했다. 다만 로우레스는 모처럼의 제 잠을 깨운 서브 클래스와 로젠이 불만일 뿐이였다. 명백히 리히트 역시 강한 편이지만 인간이였고 아직 제 감정에 미숙한 열 여덟에 불과했다. 그래도 24시간 떨어지게 된다면 이후의 일 따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는 영리했다. 그럼에도 순순히 끌려나온 준 것은 꿈자리가 뒤숭숭 했기 때문이였다.

 

 제가 아닌 다른 이에게 죽음을 당하는 제 이브의 모습은 결코 보기 좋은 것이 아니였다. 맘에 안들어. 미묘한 떨림이 멈추질 않았다. 손바닥을 바지에 문지르며 로우레스는 미간을 구겼다. 금방 올검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었다.

 

-

 

 리히트가 기세 좋게 나선지 한참 시간이 흐르고 저녁놀이 하늘을 뒤덮고 이내 칠흑의 색을 낳았다. 달은 건져올리고 해를 걸어놓은 하늘은 옅게 가라앉았다. 차라리 시원하게 비라도 쏟아냈다면 좋았으련만 느릿하게 손으로 훑기만 할 뿐 여전히 어둑한 채였다. 기상 캐스터는 오후에 짧게 소나기가 올테니 외출하실 분들은 우산을 챙기라는 조언을 남겼다.

 새벽녘을 기점으로 로우레스는 미적지근한 두통을 호소했다. 이내 두개골 마저 깨질 것만 같은 통증과 함께 역한 속을 게워내지도 못하고 헛구역질을 반복했다. 분노감에 충실히 밖으로 뛰쳐나와 호텔 옥상에 궁상 맞게 걸터앉아있자 타이밍 좋게 비가 내렸다. 빌어먹을. 아직 오전 10시 였다. 세운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묻고 관자놀이를 붙잡았다. 고통은 태어날 적부터 익숙했다. 익숙하다 못해 어느 정도 즐기기도 했다. 이런 류는 즐기고 싶지도 않았다.

 

 [머리아파.]

 

 그는 기우뚱 상체를 일으켰다. 잠긴 옥상 문 너머로 적어도 인간은 들어올 수 없었다. 지겹도록 들어온 목소리, 리히트였다. 계약 특성 상 의식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의도찮게 멋들어진 '둘 만의' 텔레파시 따위를 실현해낼 수 있었다. 다만 둘 사이가 뭐가 그리 돈독하다고 쓰길 시도하지도 않았다. 듣기 싫은 상대의 목소리가 감미롭게 머릿 속에서 울려퍼지는 일 따위 리히트는 제 머리를 도려내려 했을 것이다.

 

 "리, 리히땅?"

 

 [쥐새끼 목소리. 시끄러워. 머리아파.] 

 

 "리히땅!"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았다는게 발목을 잡았다. 계약 초기에 지나가는 식으로 얘기해 준 적은 있지만 그걸 기억할 지는 의문이였다.

 

 [닥쳐, 쥐새끼. 내 머리에서 나가.]

 

 다행이도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였다. 로우레스가 기억하는 리히트 그대로, 그는 영리했으니까.

 

 "지금 어디임까. 이대로 가다 둘 다 개죽음 당할거라고요."

 

 "리히땅?"

 

 [회전목마.]

 

 이후로 무엇 하나 답하지 않았다.

 

-

 

 공교롭게도 하나 뿐인 유원지는 폐장인 상태였다. 굳이 거길 들어가 있을 그도 아니였거니 어제까지만 해도 개장이였으니 들어가 하루를 온전히 보낼 만한 위인도 아니였다. 그런 '쓸데없는' 일을 벌이길 즐기는 타입과는 거리가 멀었다.

 

 정오가 다가왔다.

 

 리히트와 떨어져 있던 것은 어제 연주회가 끝난 후 호텔에 돌아온 뒤, 적어도 오후 1시 정도였다.

 

 '폐장된 유원지가 하나 있는데, 시내에서 가까워.'

 

 손의 마디가 굽혀지질 않고 핏줄이 돋아올라 흉측한 모양새였다. 보나마나 얼굴 역시 다를 바 없을 것이였다. 로우레스는 머플러를 둘러 최대한 끌어올려 눈가 아래까지 가렸다. 여전히 작게나마 비가 내렸다. 빌어먹을 상황과는 다르게 한창 시기인 벚나무에서 잎들이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꽃길이라니.

 

 낡은 유원지는 죽은 봄과 닮아있었다. 어둑한 색채를 강렬히 남긴 구조물들이 멈추어 하나같이 저를 향해 시선을 내던지고 있었다. 작은 규모였지만 자꾸만 끌리는 발에 더디게만 나아갔다. 유원지의 정중앙을 화려히 수놓았을 회전목마는 누군가 물감을 통채로 들어부은 양 얼룩덜룩한 색들의 향연이였다. 크리스마스 트리에나 달려 있을 법한 조그만한 장신구들로 치장되어 있었다. 그의 짓이였다.

 

 리히트는 보이지 않았다.

 

 "리히땅-."

 

 그는 거칠게 머플러를 끌어내리며 불렀다. 이렇게 절박해 본 적이 있었는지를 떠올릴만큼, 이브에게 이리도 간절했던 적이 있었는지를 회상할 만큼.

 

 "망할, 쥐 새끼."

 

 리히트는 비틀거리며 회전목마와 조금 떨어져 있는 운전석에서 쓰러지 듯 튀어나왔다. 비틀거리는 걸음세가 영 좋지 않았다. 제 의지와 상관없이 리히트는 로우레스의 품에 안겼다. 엄밀히 말하자면 로우레스가 리히트를 붙잡아준 것이지만. 평소였다면 기꺼이 밀쳐냈을 그였지만 꽤나 얌전히 숨을 색색 거렸다.

 

 "조금만 늦었으면 죽을 뻔 했슴다."

 "죽는게, 무서워?"

 

 리히트의 말에 로우레스는 미간을 구기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리가 없잖슴까. 리히트는 로우레스의 어깨를 짚고 이마를 맞대었다. 이만하면 충분한 신체접촉으로 통증이 가라앉을 법 했지만 여전히 그의 이마는 뜨거웠다. 얇은 셔츠로 간밤을 지새기엔 충분하지 못한게 뻔했다. 감기라도 걸린검까. 정말 리히땅은-.

 

 뜨거운 입술이 닿았다. 서툴은 입맞춤은 뜨거웠고 애처로웠다.

 

 "난-, 난 무서워."

 

 한순간의 장난일까. 로우레스는 말없이 리히트를 내려다보았다. 반 쯤 풀린 눈이였지만 너무나도 확고해보였다.

 

 "그런데, 너라면. 상관없을거같아."

 

 리히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소란스레 소나기가 한바탕 자리했다. 로우레스는 그를 안고 낡은 운전 박스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좋았다. 우선은 열부터 식혀야했으니까. 역시 제가 아닌 것에 죽음을 맞이하는 제 이브란 좋은 꼴이아니였다.

 

 죽는 그 순간까지 난 당신을 기억합니다.

 

 그만의 유별난 이브 사랑법이였다.

 

 "난, 리히땅의 그 희망찬 무지함을 동경함다. 미숙한 감정을 사랑함다."

 

 편안히 눈 감은 리히트는 경멸하는 로우레스의 팔에 안겨 잠들어 있었다. 로우레스는 가만히 뺨을 쓸어주었다. 잠결에 뒤척이지도 않고 얌전히 잠든 그의 눈 위에 작게 입 맞추었다.

 

 리히트 지킬란드 토도로키. 열 여덟. 세간을 떠들석하게 하는 천재 피아니스트가 아닌 오로지 자신 하나만으로 벅찬 나이. 어리숙한 감정.

 

 난 지금 이 순간 속 당신을 기억합니다.

 

 그만의 독특한 리히트 사랑법이였다.

 

-

 

다 했...다

 

(와장창)

 

긴 말 하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길어지겠지

 

그냥, 음- 얘네 예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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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어 님께 협박당한 글  리퀘

 

*기괴설정에 주의해주세요

*과거 날조 주의 


(시점은 나태조와 탐욕조가 만난 후 시점부터 봐주세요/의도찮게 탐욕조가 서브지만 왠지 모르게 메인이 되어버린 듯하지만 카테고리 새로 파기 귀찮으니 이대로 가자 라는 이론의 만행)

 

-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검은 악마 하나가 주위를 서성인다.
 선혈 가득의 이를 탓해야 하는가, 그를 홀린 악마를 탓해야 하는가.
 누가 널 이리 무자비도 먹어치웠는가 물어도 역시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렇기에 죽은 자임이 틀림없다.

 

 그야말로 열 가지 무(無)에서 피어오르는 순결의 혼백.

 

-

 

 마히루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폭신한 이불 위를 뒹구는 제 서뱀프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질 않았다. 쿠로는 유유자적한 시간을 온전히 보낼 수 있다는 사실보다 뚫어져라 저만을 바라보는 이브란 작자의 눈치를 살폈다. 물론 제가 한 걸음 양보한다면 얼마듵지 설명이 가능한 일이였다. 안타깝게도 그에겐 그럴 추호도 없었다.  가끔 진실이란 것은 건장한 정신으로 버텨내기 역부족일 만큼 괴롭고 추하며 잔혹할 때가 있다. 가끔은 아무 것도 몰라도 좋다. 그 이면에 귀찮음이 베여있는 것은 틀림없었다. 마주할 수 없어. 그는 중얼거렸다.

 

 "쿠로, 역시 이해가 안가."

 

 아 시작됐다, 시작됐어. 쿠로는 잔뜩 미간을 구기며 상체를 일으켜 마히루를 마주보았다. 그는 언제나 모든 것을 알려 하였고 쿠로는 나태의 서뱀프 라는 호칭에 걸맞게 귀찮음으로 대응해왔다. 어쩌면 일종의 방어술에 가까울 지도 몰랐다.

 

 "로우레스 라면 맹세컨데 오늘 처음 봤어. 그런데 어째서 날 공격한거야?"
 "..그 녀석 일이라면 나도 몰라."
 "하지만 나한테, '오랜만입니다' 라고 말했는걸."

 

 나랑 누군가를 착각한걸까. 마히루는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이마에 검지를 갖다대었다. 쿠로는 짐짓 놀라 평소보다 크게 뜬 눈을 도로 감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제 고민에 빠져 역시 심플한게- 를 연호하던 그는 쿠로의 반응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보았다 하여도 그저 이상하다 정도로 그쳤을게 눈에 훤했지만 말이다.

 

 알 길이 없어 답답한 쪽은 마히루였다. 서뱀프에 관한 것이라면 여전히 미지에 가까웠다. 게다가 호기심 왕성한 저에 비해 생명과 연관되는 중요한 사실마저 묻지 않았다는 이유로 침묵해버리는 이름 값 톡톡히 하시는 나태의 서뱀프님 덕분에 알고 있던 것들 조차 뒤죽박죽 섞이고 마는 기분이였다. 물론 심플한게 좋지만 그렇다는 이유로 진실까지 치부해버릴 추호는 없었다. 눈 앞의 이리도 가까운 답을 두고 무엇 때문에 돌아가야 하는지 원망스러울 뿐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원흉은 일순의 순간에 뒹굴거리는 꼴이되어 하얀 이불 위로 파묻혀있었다. 누가 나태 아니랄까. 마히루는 쿠로의 등허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쿠로."

 

 깨울 작정이였다. 그는 가물가물한 눈을 억지로 비집어 열었다 결코 좋은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은 마히루에 도로 눈을 감아버렸다. 어이, 쿠로! 그는 작게 몸을 뒤척였다. 귀찮아. 미묘한 효과음과 함께 그는 한 마리의 작은 고양이 행세를 하고 있었다.

 

 "너 내가 이 모습일 때 약하다는거 알고 이러는거지."

 

 그의 손은 더 이상 점퍼 따위가 아닌 검고 보드라운 털을 맞대고 있었다. 이럴 때만 약삭 빠르다는 점 하나만은 높이 살 만한 것이 틀림 없었다. 마히루는 쿠로를 깨우는 것을 그만두고 방을 나섰다. 다들 힘 내는데 혼자만 보란 듯이 놀 수만은 없는 천성 탓이였다. 행여나 쿠로가 깨기라도 할까 조심스레 미닫이 문을 밀어 닫았다. 우선은 돌아갈까나. 그리 중얼거리며 겉옷을 챙겨든 후 온천을 빠져나왔다. 벌써 몇 일째 집을 비웠다는 것을 상기시키며 여유롭지만은 않은 걸음은 순식간에 빠르고 넓은 보폭이 되었다.

 

 의도찮게 간단한 집안 일을 마쳐놓고 쿠로에게 줄 포테토 칩 한 봉지를 집어 들고서 마히루는 제법 만족스레 온천으로 향하는 것은 명백히 직업병을 닮아있었다. 

 

 "어라라- 이거 나태 형님의 이브 아님까."

 "로우레스?"    

 "이거 참 우연이지 말임다."

 

 로우레스는 역광을 진 채 마히루를 벽으로 몰아넣었다. 일전에 쿠로와 싸웠을 적과 같이 여전히 소름 끼치는 미소가 만연했다. 그는 강하다. 제 입으로 마음만 먹으면 여럿이서 온전히 상대해도 힘들 적을 홀로 헤치운다 말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도발했다. 결과적으로, 심플하게 보면 마히루에게 있어 경계 인물이였다.

 

 그다지 탐욕은 협력할 마음도 없고 그의 이브 역시 같았다. 적어도 그가 아는 선에서는 그러했다. 둘의 관계는 단순한 이브와 서뱀프의 관계가 아니였다. 서뱀프는 이브에게 복종한다. 하지만 로우레스의 경우는 오히려 반대였다. 제게 평화주의자 스러운 면이 있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도 다른 이브나 서뱀프들과는 확연히 다른 관계라는 것이다.

 

 "형의 기척도 없고 하니 길-게 대화라도 해보지 말임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마히루는 더 이상 뒷걸음질을 쳐도 의미없다는 사실을 내심 알고 있었다. 어찌 되었건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낼 터였다. 게다가 이브와 서뱀프의 전력 차이라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직도 그들에 관해서 모르는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이제 막 알의 막을 헤치고 나온 어린 새끼와 같은 꼴이였다. 하지만 명백한 한 가지라면 자신은 곤란한 상황에 빠져있고 탈출구는 지극히 협소하며 홀로라면 가능성이 제로에 가깝다는 사실이였다.

 순식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머리로 이해하기도 전에 상체가 먼저 고꾸라지더니 하체 역시 맥 없이 픽 쓰러졌다. 복부에 근육이 갈라지기라도 하는 듯한 통증이 엄습하더니 주위로 퍼져나갔다. 명치 부근이 아니였음에도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탁한 숨만을 겨우 내쉬건데 눈 앞이 흐렸다. 손발 끝이 저릿하며 관절 마디가 모두 일렬로 늘어서 뻣뻣해져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 경련이라도 일어난 양 힘은 들어가지도 않고 마냥 미세한 떨림 사이로 흩어져만 갔다. 


 자- 그럼, 안녕히 주무시죠.


-


 "가엾은 운명은 돌고 돌아 마치 회전목마 마냥 다시- 돌아온다."


 마히루가 흐릿하게 나마 정신을 차렸을 적엔 로우레스는 정신없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손목을 포박하고 있는 쇠고랑이 녹슨 쇠음을 내자 그는 목적지를 찾은 듯이 반듯하게 걸어왔다. 올곧게 입가의 끝을 올리는 그는 한 걸음을 남겨둔 채 제자리에 섰다. 머플러가 펄럭이고 두 팔을 커다랗게 휘둘러 마지막으로 왼발을 오른 발 뒤로 점을 찍었다. 기괴스러운 몸짓은 영락없는 신사의 인사법에 불과 했다.


 "좋은 꿈 되셨슴까."


 눅진한 역한 향이 천천히 벽을 타고 오르는 듯한 기분을 떨쳐낼 수 없는 방이였다. 방이라기보다는 영화에서나 보던 지하 감옥과 같은 형세 였다. 멀쩡한 빛 하나 들지 않는 곳은 어둡고 축축하기 그지없었다. 벽면에 걸린 촛대의 건장한 남성 성인의 팔뚝보다 굵은 촛대 위의 아른거리는 불빛만이 지켜낼 따름이였다. 바닥은 촛농으로 어지럽혀진 것이 꽤나 오래 전부터 써오던 장소인 듯 했다.


 "왜 이러는지 궁금하실거라고 생각함다."


 로우레스는 제법 신나게 기세좋게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단지 말 상대가 필요했다 정도의 가벼운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마히루에게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묶여 있는 것이 설령 츠바키라 할지라도 적이고 아군따위 가리지도, 만들지도 않는 그에게는 애초부터 의미없던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였다. 

 그는 머플러는 찢어낼 듯 풀어헤쳤지만 곱게 내려놓았다. 후에 아무래도 좋다는 양 조끼와 셔츠는 뜯어냈다. 면티가 갈기갈기 흩어져버렸지만 그는 태연스레, 오히려 휘파람이라도 불어대며 양옆을 더 찢어내었다. 그는 제법 상냥히 웃어보였지만 묶인 사람에게 그렇게 보일 리가 없지 않은가. 조끼와 셔츠는 옆으로 거둬 골반 쯤에서 잡아 복부가 드러나게 하더니 붉은 동공이 아래서 위로 움직였다.


 "어떠심까, 이 걸작."


 복부의 정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새살의 흔적은 영락없는 나비의 형체였다. 네 방향으로 갈라진 선은 옅게 남아 도드라져 보였다. 온전히 살결만 이어 붙은 것이 로우레스가 숨을 들이마셨다 내쉴 때 마다 살아 꿈틀대는 것만 같았다. 


 "어째서인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말임다. 이거, 나태 형이 남긴검다. 아무래도 같은 서뱀프 끼리라 그런건지, 이 이상으로는 도저히 회복될 기미가 보이질 않아서 말임다."


 뭐 저도 꽤나 곤란하지만요. 그는 옷에 붙은 먼지를 털어내는 손짓으로 흉터를 쓸어내렸다. 마히루의 눈 앞이 멈췄다 다시 재생되기를 반복했다. 노이즈가 웅얼거렸다 돌아오는 스크린 마냥. 이리저리.


 "그게, 무슨..소리야."

 "당연한 소리지만 형이 그런걸 당신에게 알려줄리가 없잖슴까. 그야 모-든게 당신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까요. 이 방을 기억 못한다는 것만으로 충분함다."


 헤실거리던 웃음기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싸늘하게 내뱉은 충분하다는 그의 말에도 미히루는 여전히 무엇 하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의 말대로 라면 저는 이 방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전혀 그러지 못했다. 이것도 쿠로가 얘기해주지 않은 한 부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당장의 이성적인 논리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다고."

 "그-러-니까, 그게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잖슴까. 형이, 감히 나태의 서뱀프인 형이 이브라 해도 당신께 그런 건 가르쳐줄리가 없슴다. 물론 나태 이전의 문제지만."

 "쿠로가, 쿠로가! 뭘 안 알려준건데!"

 

 로우레스는 하찮다며 걸어와 무릎을 세워 복부를 찍어올렸다. 


 "닥쳐. 당신이 잘한건 지금 여기 있는 것 뿐임다."

 "그러, 니까..모르겠다고, 말하잖아.."


 그는 허리를 바짝 숙인 채 방 안 가득 소리로 찰 때까지 웃어댔다. 그것은 비웃음이였고 허탈함이였다. 


 "정말 형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네요. 물론 나쁜 방향으로 말임다. 그렇다면 제가 알려드리죠. 과거의 모든 일을."


-


 서뱀프는 단 한 번의 계약이 허락된다. 그렇기에 서뱀프에게 계약이란 최초이자 최후의 선택이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 어떠한 경우도 계약한 자가 아닌 이와는 계약 할 수 없다.

 이브란 서뱀프와 계약한 자를 일컫는다. 계약에 관한 권한은 이브가 가진다. 이브는 서뱀프와 계약을 하므로 그들을 수하로 둘 수 있으며 그들에게서 무기를 얻을 수 있다. 이브는 단 하나의 서뱀프와 계약할 수 있다. 이브는 환생한다. 현생에서 계약 후 죽음에 도달하면 도로 환생한다. 그리고 다음 생 역시 서뱀프의 이브로 살아가게 된다. 그 증거로 첫 계약 시 서뱀프의 힘을 미약하게 가지게 되는데 이로 서뱀프들은 환생한 이브를 찾을 수 있다. 환생 시 경우에 따라 전생의 기억을 가지기도 한다.


 나태는 사막에서 저를 살려준 전쟁터의 한 아이와 계약을 맺었다. 어딘가의 동화인 은혜갚은 ~ 처럼 사려가 깊지 않은 그였다. 다만 여전히 희망을 놓지 않은 눈이 마음에 들었던 것 뿐이였다. 반군의 난사질에 엇맞은 아이는 붉게 물드는 손에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너, 나랑 계약하자. 예나 지금이나 뜸금없는 소리는 때를 가리지 않고 잘했던 모양이였다. 

 희망 찬 눈을 보면 제 귀찮음을 덜기 위한 것은 절대 아니였다. 어쩌면 이 또한 적당히 그가 갖다붙인 것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다만 전쟁터에서 하루가 다르게 제 목숨 하나 겨우 이어가는 그곳에서 먹을 것을 나눠주고 잠자리를 내어주며 오직 나태가 살아있음에 기뻐하는 아이란 좀 처럼 거부하기 어려운 것이였다. 


 단지 그 뿐이였다.


 탐욕은 결과적으로 제 식사를 방해하던 가출 소년과 계약을 맺었다. 성에 차지 않는 식사를 마친 후 돌아서자 그는 무심히도 '맛 없던 것' 과 탐욕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더니 검지로 대뜸 탐욕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 로우레스 구나.


 영문을 모를 소리를 하던 그를 한 입거리로 삼을까 하며 고민하던 중 소년은 제 손을 만지작거리더니 미간을 구겼다. 좀 더 자세히 상상할걸. 

 버릇없이 구는 건 둘째 치고 살인 장면을 마주했음에도 알 수 없는 제 할 말만을 들어놓는 그는 탐욕에게 꽤나 흥미였다. 그 뒤로도 저를 따라다니며 '로우레스' 라고 불러댔다. 이유를 묻자 간단히 답했다. 넌 내가 상상해서 이 세상에 나온거야.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심심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으로 단번에 계약 해버렸다. 


-


 "츠바키 라면 처음보는 녀석도 아님다. 당신네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오래 전부터 우리와 함께 있었슴다. 그리고 그 녀석의 안식처 랄까, 봉인되어 있던 곳이 여기 였던 것 뿐임다. 지금, 그 자리에."

 "그럼, 난 원래 전쟁터에 있던 아이고. 내가 쿠로를 주운거라고?"

 "원래가 아니라 전생임다. 그게 전전전생일지도 모르지만 말임다."


 로우레스는 피식 웃더니 마히루의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자리에 봉인되어 있었슴다. 리히트와 함께. 그리고 제가 풀었죠. 츠바키와 함께."


 그는 커다랗게 두 팔을 벌리더니 이내 뒤로 쓰러지듯 누우며 숨소리만 남을 정도로 웃어댔다. 두 다리를 끌어올려 양옆으로 구르며 웃더니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앉으며 눈가의 눈물을 훔쳤다. 


 "누구 때문에 츠바키를 리히트와 봉인했다고요. 그래서 제가 풀었어요. 가엾은 리히트- 봉인 덕택에 환생도 못하고 여기서 홀로 차갑고 어둡고 외롭게, 여길 지키고 있었다고!"


 로우레스는 마히루에게 달려들어 그의 목을 짓눌렀다. 목뼈가 으스러질 듯이 한 손에서 두 손으로 늘었고 숨이 막히기 이전에 뼈가 부러질거란 생각이 마히루를 엄습했다.


 "웃기는거 하나 알려드리겠슴다. 나태 형이 왜 나태인 줄 아심까."


 그는 갑자기 힘을 풀더니 두 팔을 뻗은 채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그러더니 손을 찢어진 티에 슥- 하고 문질렀다.


 "사랑에 눈이 멀어 제 할 일을 모두 내팽겨쳐서 임다. 그래서 나태하다고 말이 붙었고요. 웃기는 일이죠. 나태와 사랑이라니 이런 조합따위 말도 안돼. 리히트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할테지만요. 그렇죠?"


 그는 곱게 내려놓은 머플러를 주워들어 가볍게 품에 안았다. 그리곤 익숙한 모양새로 머플러를 매더니 그 안에 얼굴을 묻고 크게 쉼호흡했다.


 "그리고 그 사랑이란건 말임다. 꽤나 웃기는 놈임다. 꽉 찬 것 같지만 실제로 속을 들여다보면 텅 비었거든요. 물론 나태 형은 좀 다른 것 같습니다만. 지금은 아니지만 딱 전전생 까지만 해도 나태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도록 열성적이였슴다. 그 사람 한정이였지만 말임다. 나태인 주제 잘도 숨기고 다니네요."


 그는 여전히 머플러 끝자락을 놓지 않은 채였다. 


 "그렇지, 형-?"


 멀리서부터 촛대가 일렁이더니 삽시간에 군데군데의 촛불이 꺼져 연기만을 피워냈다. 그 광경이 마치 향이라도 피워내는 묘지같아 마히루는 살기에 숨을 멈추었다. 턱 아래까지 밀려들어오는 오한은 그리 반가운 것이 아니였다. 


 서뱀프이자 장남이자 나태이자 쿠로였다.


 반지 앞 주머니에 손을 넣고 반 쯤 굽은 허리로 발을 끄는 그가 아닌 온 몸에 형용할 수 없는 살기가 도는 '쿠로' 였다. 새까만 그림자 안 붉은 눈동자만이 커다랗게 일렁여댔다. 


 로우레스는 빈정거렸다. 이름 하나는 잘 어울리네요, 쿠로(黑) 이라니. 그러면서 그는 머플러는 입가까지 끌어올렸다.


-


 "탐욕에게 납치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미소노는 책상을 치며 상체를 일으켰다. 리리이는 그런 미소노를 자리에 앉히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자자, 미소노. 우선은 할 말이 더 있는 것 같으니까 진정하죠. 어린 주인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도로 앉자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테츠는 호오- 라며 중얼거렸다. 


 "쉽게 타오르는 성질인가."

 "아니야!"


 테츠는 제 서뱀프인 휴를 돌아보더니 미소노의 반응따위 없었던 것 마냥 둘 만의 대화를 이어나갔다. 리리이 역시 곤란한 건 마찬가지였다. 어린 주인이 언제까지고 고분고분히 제 말을 들어주지만은 않을테니 그 전에 해결해야만 했다. 

 저들이 츠바키의 탐색을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마히루는 나태를 두고 혼자 사라졌다. 사실 그들은 나태 역시 본 적 없으나 때마침 로젠이 리히트를 통해 나태의 행방을 알고 있었다. 더불어 시로타 마히루의 행방에 관해서도. 


 "리히트는 나태와 함께 둘을 찾으러 갔어. 나태도 제 이브니 어렵지 않게 찾을거라고 생각해. 다만 문제라면- 어째서 로우레스가 마히루 군을 납치했냐는건데."

 "그 문제라면 내가 알고 있다."


 박쥐의 형태로 취하던 휴는 어느 새 인간체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잔뜩 미간을 구긴 채 리리이를 바라보고 있었고 리리이 역시 평소와는 다른 가라앉은 미소였다. 미소노는 리리이로 시선을 돌렸다.


 "너도 알고 있는거야?"

 "뭐- 네."

 "서뱀프들, 아마 츠바키 까지 포함해 알고 있을거다."

 "그 문제라는게 리히트와도 관련이 있는건지."

 "물론이다! 가장 크게 연관된 것이 그 청년이다."

 "휴, 자세히 말해봐."


 휴는 흠칫하더니 눈을 굴렸다. 그게. 


 "얼른 말해야 우리도 도울거 아니야."

 "사실 우리는 크게 관련이 없으니 하는 말이지만 슬리피 애쉬와 로우레스의 얘기다. 그 둘이 어긋나게 된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문제냐고 묻잖아."

 "흠- 멋대로 얘기해버리기엔 다소."

 "나태가 탐욕의 이브를 죽였습니다. 자신의 이브를 살리기 위해서요."


 리리이가 입을 열었다.


 "올 오브 러브!"


 휴의 낯빛이 새파랗게 식었다. 하지만 그는 미동조차 없었다. 


 "테츠 군이 한 말이 맞습니다. 도울 수 있다면 도와야합니다. 아니면 그 때의 일이 다시 반복될게 뻔해요. 로우레스라고요. 마히루 군을 죽이러 들겁니다. 아마 보는 앞에서 말이죠."


 휴는 마른 세수를 하더니 이내 끄덕였다. 


 "츠바키는 원래 봉인되어 있었다. 다만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풀려난 것 뿐이다. 그 전까지 지하에 봉인되어 있었는데 힘이 강해 도저히 혼자 봉인시키기에는 역부족이였다. 그래서- 로우레스의 이브와 함께."

 "그게 무슨 소리야. 츠바키라면 처음 보는데."

 "자네는 전생까지 기억하는 모양이지만 안타깝게도 그 때는 봉인되어 었었다."

 "미소노는 잘 모르던 때라서 그런겁니다. 계속해주세요."


 휴는 리리이의 말에 잠시 끊어진 흐름을 다시 이어나갔다.


 "문제라면 그 츠바키를 잡아 가두는 과정에서 슬리피 애쉬의 이브가 츠바키와 그의 서브 클래스에 의해 죽기 직전의 상황이였다. 봉인이란건 최대한 힘을 억눌러야 하는데 그렇게 기력이 쇠하니 도저히 안될터였고 그래서 마침 곁에 있던 로우레스의 이브였던 청년을 재료로 쓴게지. 로우레스는 이에 분노했고 아마 슬리피 애쉬의 이브 탓이라고 생각하는게일 터야. 하지만 슬리피 애쉬의 이브도 때를 넘기지 못하고 그만 죽어버리고 말았지."


 긴 설명의 끝은 침묵이였다.


 "로우레스는 제 이브를 사랑했어. 지금 역시."


-


 "역시 올 줄 알고 있었슴다, 형."

 "쿠로..!"

 

 손가락의 관절 하나하나가 꺽이더니 목이 기계마냥 굳은 채 돌아갔다.


 "당장, 풀어."


 결코 그의 페이스를 잃지 않았음에도 낮게 읊조리는 나태스런 목소리는 귓가에 찌르르 하고 멤돌았다. 


 "풀어."

 "싫다면 어쩔검까."


 로우레스 역시 검을 뽑아들며 허공을 휘저어댔다. 


 "형의 이브 사랑은 유별난건 알겠슴다. 그렇다고- 남의 이브를 그 따위로 갖다 쓰는건 어디 상식임까!"  


 먼저 달려든 쪽은 로우레스 였다. 오른팔을 크게 휘두르며 손목을 꺽어 얇은 검을 옆으로 찔러넣었다. 쿠로는 달리 움직이지도 않은 채 뒤로 두어 걸음을 빠져나왔다. 허공을 짚은 로우레스는 방향을 틀어 검을 밀어넣었다. 연한 살을 뚫는 쾌감에 한껏 승리에 취한 미소가 번지기 시작할 무렵. 쿠로는 그의 뒤에서 목 아래를 손으로 찔렀다. 두 마디 정도가 수면 아래로 사라진 채 이성을 잃은 그가 손을 휘두르자 힘 주어 비틀어 빼내었다. 검붉은 피가 흡사 구멍에 가까운 상처를 에워싸고 짓눌러 그 안에 묶인 죄라도 쏟아냈다. 


 쿠로는 제 이브를 속박한 쇠사슬을 손짓 하나로 간단히도 끊어냈다. 손을 비롯한 팔은 거의 질리다시피 허옇게 식어있었고 마히루는 그것 하나만으로 고역이였다. 로우레스에게 가격당한 복부 역시 무사하지는 못했기에 사슬이 끊어짐과 동시에 그는 쿠로의 품에 안기듯 내려앉아야했다. 


 "마히루, 마히루..!"

 "쿠로."

 "괜찮아?" 


 그는 눈을 두어 번 감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느 새 쿠로는 그가 알던 모습으로 돌아온 뒤였다. 만사를 귀찮아하며 무기력한 나태의 진조로.


 "멋대로 돌아다니지 말란 말이야. 귀찮다고."

 "미안. 그냥 잠시 집에 다녀온다는게 이렇게 되버려서."

 "자칫 하다가 그 때 처럼..!"


 멈칫. 그는 어금니를 맞물려 갈며 눈을 피했다. 마히루는 말 없이 그런 쿠로를 올려다보았다. 그 얼굴이 마치 로우레스와 마주 했을 때와 같다고 생각했다. 


 "..가면 간다고 얘기 정도는 하고 가."

 "아- 응."


 쿠로는 마히루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우고는 앞 장 섰다. 주머니에 손을 비집어 넣은 채 구부정하게 걸으면서도 그는 간간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이 익숙하지 못한 탓에 마히루는 어색히 웃기만 했다. 가고 있다니까. 이내 쿠로는 마히루의 손을 잡아끌더니 소매를 붙잡게 하였다. 그제서야 돌아보기를 그만 둔 그에 마히루는 조금 미묘한 심정을 내비췄다.


 "손이면 손이지 왜 소매야. 그리고 나 잘 따라가고 있다고, 무슨 어린 애도 아니고."

 "귀찮아."

 "뭐가 귀찮다는거야."


 내색하면서도 결국 얌전히 손을 내어주는 쿠로에 마히루는 작게 웃었다.   


 "쥐새끼는."

 "제일 안쪽 광장."


 오늘은 가방이 보이지 않는 리히트가 반대편에서 여유롭게 걸어오고 있었다. 대뜸 자신의 서뱀프의 행방을 묻는 그보다 마히루는 그의 텅 빈 어깨가 더욱 눈에 들어왔다. 


 "로우레스, 미워하지 마."

 "네..?"

 

  오로지 제 할 말만을 남기고 리히트는 제 갈 길을 가버렸다. 그가 사라진 반대편을 한참이고 바라보자 쿠로가 그를 잡아당겼다. 


 "혼자서 멀리 가지 마. 안그래도 되니까."

 "쿠로가 귀찮아 하잖아."

 "..혼자 가지마."


-


 "어이, 쥐새끼. 죽었냐."


 리히트는 굽으로 로우레스는 건들였다. 출혈이 멎은 목은 말끔히 새 살이 돋아나있었다. 


 "리히땅-? 어떻게 여기,"

 "쥐새끼의 형님 되시는 분이랑 같이 왔다만."

 "그 자식이- 어떻게."


 리히트는 비교적 핏방울이 튀지 않은 곳에 털썩 주저앉더니 거적때기 마냥 늘어진 검은 머플러를 집어들었다. 로우레스는 천천히 몸을 틀어 제 이브를 바라보았다. 색 덕분에 핏빛으로 물드는 것을 면했을 뿐인 머플러는 묵직하게 적셔있었다. 


 "버려."

 "리히땅이 준거니까 아직은 쓸까나- 싶어서."

 "더러워."


 경멸스러운 시선에도 로우레스는 시종일관 웃었다. 리히트는 기분나빠 를 연호하며 뻔뻔스런 낯짝 위로 머플러를 던졌다. 


 "무슨 일 인지 설명해."

 "아아- 그거 라면,"

 "피곤하니까 잘거야. 그리고 나서 해."


 리히트는 로우레스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누우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팔."

 "에-?"

 "바닥 딱딱하니까 못 잔다고. 팔 내놔."


 어안이 벙벙해진 그의 팔을 잡아당기더니 리히트는 기세 좋게 베고 누워 잠을 청해버렸기에 도저히 어쩌지도 못하는 웃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증오도 허무도 슬픔도 아닌 고요가 가라앉았다. 우선은 아무래도 좋았다. 리히트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벅찼지만 이런 류의 서프라이즈에는 약한 그였다. 남은 팔을 천천히 그의 허리 위에 얹었다. 잘자, 리히트. 좀 더 안으며 그 역시 눈을 감았다. 


 "로우레스."


 리히트는 감고 있던 눈을 살며시 떴다. 어리숙한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었다. 아둔한 자식. 그리 중얼거리며 뺨에 작게 입맞췄다. 어차피 정신은 이미 아득해진 상태일 테고 깨어있다 해도 저는 자고 있다고 생각하니 이래나 저래나 상관없었다. 좀 더 안으로 파고 든 채 눈을 감았다. 심장이 뛰긴 뛰는구나. 다음 음악회 메인으로 쓰면 되겠다. 그런 생각을 했다. 


 결코 텅 비지만은 않았다. 처음 만남부터 지금까지.


-


흐어어어어ㅓㅓㅓ어어ㅓ어ㅓ엉


지금은 새벽 4시 32분/노트북 시계로


나는 오늘 잠을 포기하겠다 죠죠!!!!1 같은 상황 연출은 바란 적이 없으나 


우연찮게 이렇게 되서 유감스러운건지 뭔지 잘은 모르겠지만


마감!!! 완료시마시타!!!!!! 우와아아ㅏㅏㅏㅏ


사실 지금 내가 뭐라고 써놨는지 기억도 안나고...ㅋㅋㅋㅋㅋ


분명 쿠로마히였지만 결국 난 탐욕조였나봅니다, 음음


이번 글 쓰면서 깨달았어요, 탐욕조가 취향인건같습니다 :D (빵긋-)


그럼 오전에 보면 더 이상 이 건으로 시달리지 않겠네요 하핳  



아 역시 제목은 어떻게든 해명해야할거 같아서..음-

해명이라고 한 시점부터 망한건 알지만 그래도..!! 하핳


쿠로 입장에서는 마히루를 지키지 못한게 죄고 혼자 가지 말라고 말하는거고요, 음

로우레스는 뒷 부분 전체적으로 보면 되지..되, 되지 않을까...하지만 

 

살해당하고 말거야, 암살 당할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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