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켄 전력 60분 ; 목소리

 

(짝사랑 요소 있습니다)

 

-

 

 쿠로오와 켄마는 제 인생의 대부분을 함께 지냈다고 해도 부족할 정도로 길고도 끈질긴 인연이였다. 부모님끼리 친했으니 엄밀히 따지고보면 켄마의 탄생시점부터 둘은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친구' 였다. 쿠로오가 한 살 많고 켄마가 한 살 어리고 따위의 자잘한 문제는 모두 떠나서.

 그것은 불행이자 행운이였다. 켄마는 그리 생각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더워. 게으른 천성이 어딜가리, 이미 뇌는 녹아내렸다고 믿으면서도 몸을 움직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선풍기의 예약시간이 끝났는데 켄마의 잠을 방해하며 웅웅 귓가에 울리던 소리는 깨닫지도 못한 새에 잠잠해들어 있었다. 다시 켜야될텐데. 뭐, 상관없나. 찌르르- 하고 꼭 꼭 닫아놓은 창 밖에서 매미가 우는 것만 같았다. 켄마는 마른 침을 삼켰다.

 

 "더워."

 

-

 

 본디 감성적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감정이 메마른건 아닐까 하고 되내여봐도 좋은건 좋은거고 싫은건 싫은거니까 그건 아니라 생각해왔다. 그건 호불호의 문제잖아. 하고 주위에서 타박해와도 그러려니 했지만 무엇보다 그런 말들을 귀에 들어가지 않게 해 준건 쿠로오 였다. 켄마는 원래 이런거야. 어, 이게 도시 남자라는거지. 쿨-하고. 그지? 씨익 웃어보이며 나 잘했지 라는 의기양양해 하는 얼굴을 하곤 제 옆을 나란히 걷던 사내란. 지금 떠올리자니 조금은 우습기도 했다.

 쿠로오와 저의 거리를 느끼기 시작한건 꽤나 어릴 적부터 였다. 그렇게 끈덕지게 붙어다니며 제 끼니를 챙기고 준비물을 확인해주며 숙제를 도와주고 등하교는 꼭 함께 했다. 불편하면 그러지 않아도 좋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는 없으니까 그냥 다 물었다. 그게 최선이였다. 미안, 쿠로. 전혀 괜찮은데.

 

 아니, 그런게 아니야. 용기 없는 나라서 미안해.

 

 연상이라는 책임감에 휩싸여 있던 걸까. 내가 '형'이니까 더 잘해야 돼, 따위의 의무감에 가까우려나. 아니면 단순히 어린 아이의 부모에 대한 애정갈구를 위한 도구였을까. 그게 습관이라도 된 모양일까. 비겁하지만 이런 생각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애초부터 난 이런 놈이였는걸. 쿠로.

 

 쿠로오가 먼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의 1년이라는 공백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였다. 하지만 '공백' 이란 말이 무색하게 연락을 계속해왔고 덕분에 이어나갈 수 있었다. 이 아슬아슬한 관계를. 다만 학교에서나 반에선 외톨이 였다. 그걸로 좋았다. 오히려 그게 좋았다. 좀 더 동정심이라도 불러일으킬테니까. 그 나이부터 저는 이런 생각을 해왔을지도 모르는 일이였다. 난 약하니까. 그러니까.

 쿠로오가 원했고 저도 그게 편했기에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같은 학교에 지원했다. 배구 덕분에 꽤 흔쾌히 입학이 승낙된 모양이였다. 배구라. 쿠로가 원해서 했을 뿐인데. 어디까지나 그의 옆자리에 있기 위한 허울 좋은 수단에 불과했다. 그게 아니라도 쿠로오라면 얼마든지 제 옆에 머물러 줄 터였다.

 

 '소꿉친구' 니까.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켠 휴대전화 화면은 눈이 따가울 정도로 밝았다. '밝기'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작동한다면 상관없었으니까. 너랑 내 관계도 결국 그런거겠지, 쿠로. '친한 정도' 따위 아무래도 좋아. 지속되기만 한다면 상관없어. '친한 정도'라는건 관계가 지속되기 위한 부속품일 뿐이니까.

 

 목록을 죽- 둘러보았다. 정말 볼품없었다.

 야쿠. 리에프. 타케토라. 이누오카. 시바야마. 후쿠나가. 카이를 비롯한 네코마 시절 배구부와 제가 3학년이 되고나서 만난 배구부. 쇼요. 카게야마(천재). 케이지. 보쿠토(시끄러운 부엉이).

 가족을 제외하고 여기서 저와 관계를 유지해나가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여긴 없지만 쿠로 정도일려나. 아- 쿠로도 가족인가. 애매해져버렸다. 가족이라면 왜 힘들어야 하는거야.

 

 이미 충분히 골치 썩는 탓에 휴대전화 따위 저 멀리 던져버렸다. 그래봐야 제가 누운 침대 안 제 손이 닿는 정도의 거리겠지만. 눈 앞이 어질어질해지는 휴대전화의 밝은 화면에 아지랑이라도 보는 듯한 착각을 느끼며 바로 누워 눈을 감아버렸다. 여름 축제 불꽃놀이의 여운 마냥 여전히 허옇게 터지는 눈 앞의 감각에 슬며시 눈을 떴다. 무언가 대단한 결심을 하고 눈을 감은 것도 아니였는데 뜬 눈을 한 제가 조금 못났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잠들지 못했고 더운 날이다. 여름인가. 

 긴 팔을 둘둘 거두었다. 잘 되지 않았다. 겨우 팔꿈치 까지 끌어올린 모양새가 엉망이였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거 어떻게 하는거야. 

괜히 솟구치는 짜증에 켄마는 상관없나-라며 대(大)자로 팔을 크게 벌렸다. 덥네.

 

 그 날도 이렇게 더웠던가. 켄마는 작게 중얼거렸다.

 

-

 

 "쿠로는 결혼같은거 안해?"

 "갑자기 그런 얼굴로 무슨 소리래."

 "그런 얼굴은 무슨 얼굴."

 "있어, 그런게. 생뚱맞게 갑자기 니가 그런 말을 할 줄이야. 뭐야-."

 "아니, 그냥. 쿠로는 충분히 할 수 있잖아. 인기도 많고."

 "인기와 결혼은 상관관계가 아닙니다."

 

 물론 내가 한 인기는 하지만. 재수 없어. 겍- 그렇게 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 

 

 "켄마."

 "난 했으면 좋겠는데. 결혼"

 "켄마."

 

 하나.

 

 "지금 이 얘기를 왜 하는거야."

 "글쎄."

 

 둘.

 

 "글쎄라니, 무책임한 발언아닌가."

 "쿠로는 어떻해 생각하는데."

 

 셋.

 

 게임기는 방바닥 어딘가를 뒹굴고 있겠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진 게임기를 생각했지만 뭐 어때. 그거 꽤 쉬웠으니까 세이브는 괜찮겠지.

 그 보다 시급한건 제 위에서 저를 내려다 보는 쿠로오 였다. 누구봐도 화가 치밀러 오른 저 얼굴. 아아- 그런가. 느릿하게 내리감았다 뜨자 쿠로오는 어금니라도 물고 있는 듯 보였다. 그렇게 화 내지마.

 

 "왜 그래."

 "여유로우신데."

 "아-."

 "장난해? 내가 결혼했으면 좋겠다고? 이 얼굴이나 그만두고 말하는게 어때?"

 

 나흘 후 쿠로오의 이름으로 청첩장이 날아왔다. 빠르네.

 고마워. 쿠로. 청첩장에 작게 입 맞추며 말했다. 담아둔 말은 많았지만 꺼내진 않았다.

 

 여름의 끝자락 그는 결혼식을 올렸다. 아름다웠다. 그 뿐이였다.

 

-

 

 뻔뻔히도 모른 척하고 등 돌린 것도 그를 몰아세운 것도 저였다. 그리고 결국 바라는건 애정이라니 우습기 짝이없지. 허탈한 속과는 다르게 몸은 착실히 다시 휴대전화를 쥐고 잊지도 못한 쿠로오의 번호를 꾹꾹 누르고 있었다. 저를 위해서라도 번호따위 바꾸진 않았을 터였다. '소꿉친구' 잖아. 넌 그런 책임감으로 의무감따위에 날 보살필 이유는 없잖아. 좋아해. 네가 행복하길 바래. 좋아해. 날 좀 더 봐줘. 좋아해. 챙겨줘. 좋아해. 신경써줘. 좋아해. 좋아하는걸. 그렇지만 소꿉친구잖아.

 

 좋아해.

 

 암울하게도 푸른 통화 버튼을 눌렀다. 수신음이 갔다. 하나. 둘. 셋.

받을리가 없잖아. 넷. 지금이 몇 신데. 다섯. 3시 45분. 여섯. 받아서도 안되고. 일곱.

 

 [..여보세요.]

 

 여덟.

 

 [여보세요?]

 

 아홉.

 

 [켄마?]

 

 열.

 

 아아- 네 목소리. 그리웠어. 이 목소리가. 그러니까.

 

 좋아해. 쿠로.

 

-

 

쿠로켄으로는 오늘 또 처음이자 첫 전력. 그냥 전력으로 두번째.

오늘 전력 두개나 뛰었어...으어-

 

쓸데마다 느끼지만 이거 생각보다 빠듯하면서 동시에 여유로운 느낌이란. 신기하다.

 

또 망했습니다! 하지만 애정합니다, 쿠로켄.

 

짝사랑 코드의 켄마가 보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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